스릴러를 잘 못 보는 편입니다. 밤에 혼자 보다가 잠을 못 자게 되는 게 너무 싫어서요.
그런데도 한번 발을 들이면 헤어나오질 못합니다.
허진호 감독의 신작 보통의 가족은 바로 그 지점을 건드립니다.
자식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당신은 어디까지 눈을 감을 수 있을지, 그 질문이 영화 내내 따라붙습니다.

스릴러를 못 보면서도 계속 보게 되는 이유
저는 공포 영화 특유의 점프스케어나 잔인한 장면보다 심리적 압박감이 더 무섭더라고요. 어떤 드라마를 본 적이 있는데, 잔인한 장면이 거의 없었는데도 밤새 잠을 못 잤습니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드라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심리 스릴러 장르에서는 이 몰입 구조를 심리적 서스펜스(Psychological Suspense)라고 부릅니다. 심리적 서스펜스란 물리적 위협보다 인물의 내면 갈등과 선택의 기로에서 발생하는 긴장감으로 관객을 붙잡는 서사 기법입니다. 칼이나 피가 없어도 충분히 손에 땀을 쥐게 만들 수 있다는 게 이 장르의 핵심입니다.
보통의 가족도 바로 이 방식을 씁니다. 두 형제 가족이 CCTV 영상 하나를 두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만으로도, 보는 사람은 자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도 그 압박감이 꽤 오래 남았습니다.
윤리적 서스펜스가 만드는 긴장감
보통의 가족에 등장하는 두 가족은 상류층입니다. 변호사 재완(설경구)은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인물이고, 소아과 의사 재규(장동건)는 도덕을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자식들이 노숙인을 폭행하는 영상이 발견되면서 두 사람의 가치관이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이 구도는 단순한 선악 대립이 아닙니다. 허진호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뉴스에서 흉악범으로 보이는 사람도 만나보면 자신만의 논리와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실리적인 선택이 최소한의 윤리가 될 수 있는 상황, 그게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입니다.
영화 서사 이론에서는 이런 구조를 도덕적 딜레마 서사(Moral Dilemma Narrative)라고 분류합니다. 도덕적 딜레마 서사란 등장인물이 어느 선택을 해도 윤리적 대가를 치르게 되는 상황을 설계해 관객 스스로 판단하게 만드는 이야기 방식입니다. 단순히 나쁜 놈을 응징하는 쾌감 대신, 불편한 질문을 남기는 방식이라 더 오래 머릿속을 맴돌게 됩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불편했던 건, 재완의 논리가 완전히 틀렸다고 단정 짓기 어렵다는 점이었습니다. 자식을 보호하려는 마음은 재규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그 불편함이 이 영화의 진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우의 즉흥 연기가 영화를 살린 순간들
허진호 감독은 배우가 대본 밖에서 만들어내는 장면을 좋아한다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김희애가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세요"라고 말하는 대사나, 국제구호단체 영상을 보며 우는 장면은 원래 대본에 없었습니다. 그 순간의 공기와 공간에서만 나올 수 있는 연기가 있다는 감독의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걸 영화 제작 용어로 즉흥 연기(Improvisation)라고 합니다. 즉흥 연기란 배우가 대본에 없는 행동이나 대사를 현장의 감각으로 만들어내는 연기 방식으로, 잘 쓰이면 계산된 연기보다 훨씬 생생한 순간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감독이 의도한 방향과 어긋나면 장면 전체를 흔들 수도 있어서, 감독과 배우 사이의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저도 드라마를 보다가 이런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장면에서 배우의 미세한 표정 변화 하나가 대사보다 더 많은 걸 말하더라고요. 그때 처음으로 연기라는 게 단순히 대본을 소화하는 일이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보통의 가족에서 김희애의 그 장면들이 평단에서 꼽히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겁니다.
이 영화가 지난해 토론토국제영화제(TIFF)에서 상영됐을 때 관객들이 예상보다 훨씬 많이 웃었다고 합니다. 토론토국제영화제는 매년 9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리는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로,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은 영화들이 주로 초청됩니다. 그 자리에서 이 영화가 웃음을 이끌어냈다는 건, 인물들의 옹졸함과 치졸함이 국적을 불문하고 공감을 샀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스릴러 몰입감을 결정짓는 요소들
스릴러 영화나 드라마가 잘 만들어졌는지 판단할 때 제가 기준으로 삼는 것들이 있습니다.
- 현실에서 일어날 것 같은 설정인가
- 인물의 심리가 납득 가능하게 그려지는가
- 시각적 자극 없이도 긴장감이 유지되는가
- 관객 스스로 선택을 고민하게 만드는가
이 중 하나라도 빠지면 몰입이 금방 깨집니다. 저는 특히 현실감 있는 설정에 약합니다. 제 주변에서도 일어날 법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드라마나 영화 속으로 그냥 빨려 들어가더라고요.
보통의 가족은 원작이 헤르만 코흐의 소설 더 디너로, 네덜란드에서 출발해 이탈리아, 미국에서 이미 영화화된 바 있습니다. 허진호 감독은 이탈리아판을 참고해 한국 사회에 맞게 설정을 조정했는데, 이 현지화(Localization) 과정이 중요했습니다. 현지화란 외국 원작의 문화적 맥락을 현지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바꾸는 작업으로, 단순 번역이 아니라 직업, 계층, 사회적 배경까지 교체하는 작업입니다. 상류층 변호사와 의사 형제라는 설정이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지, 그게 이 영화의 몰입도를 좌우할 것입니다.
영화진흥위원회(KOFIC)에 따르면, 국내 스릴러 장르 영화는 2019년 이후 꾸준히 관객 점유율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관객들이 단순한 오락을 넘어 사회적 질문을 담은 영화에 반응하고 있다는 지표로 읽힙니다. 또한 부산국제영화제 집계에 따르면 심리 스릴러 장르는 최근 5년간 국내외 수상작 중 비중이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습니다(출처: 부산국제영화제).
스릴러라고 하면 잔인하고 자극적인 장면이 먼저 떠오르는 분들도 많은데, 저는 그게 꼭 스릴러를 만드는 조건은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인물의 심리와 선택에 집중할수록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되더라고요. 보통의 가족이 그런 방향을 택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스릴러를 잘 못 보는 저 같은 사람에게도 충분히 권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 영화가 묻는 건 간단합니다. 당신이라면 어디까지 눈을 감을 수 있겠냐고요. 스릴러가 익숙하지 않더라도, 그 질문 하나만으로 충분히 극장에 가볼 이유가 됩니다. 저처럼 스릴러에 쫄보인 분들도, 심리 묘사 위주의 작품이라면 한번쯤 도전해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