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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왜 늘 계급 차이를 사랑으로 풀까

by moneybrick 2026. 4. 27.

시크릿가든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그냥 설레기만 했습니다.

현빈과 하지원이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계급의 벽을 사랑 하나로 허물어버리는 장면들이 진짜 동화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그 드라마가 방영된 이후 지금까지, 거의 10년 넘게 똑같은 구조의 이야기가 반복되는 걸 보면서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왜 우리는 재벌 남자와 가난한 여자의 사랑에 이토록 오래 열광해온 걸까요.

 

 

 

재벌 로맨스가 이렇게 많아진 배경

제가 직접 여러 드라마를 찾아보면서 느낀 건데, 재벌 캐릭터가 나오는 드라마의 수가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2024년 1분기에만 재벌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 작품이 10편을 넘었습니다. 상속자들, 눈물의 여왕, 재벌X형사 같은 작품들이 줄줄이 편성됐고, 재벌이 빠진 로맨스를 찾기가 오히려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드라마가 활용하는 계급 서사(class narrative)가 있습니다. 여기서 계급 서사란, 사회적 위계 차이를 이야기의 중심 동력으로 삼는 서사 방식을 말합니다. 재벌과 서민이라는 극단적인 계급 격차가 있어야 긴장감과 설렘이 동시에 만들어지고, 그 긴장감을 로맨스로 해소하는 구조가 시청자에게 강하게 작동하는 겁니다.

흥미로운 점은, 재벌 여성과 가난한 남성의 로맨스를 다룬 드라마들은 번번이 저조한 시청률로 막을 내렸다는 사실입니다. 성별 권력과 계급 권력이 동시에 작동하는 사회에서, 가난한 남성이 재벌 여성에게 사랑받는 구조는 시청자에게 로맨틱하게 읽히지 않았던 겁니다. 이건 단순히 드라마의 완성도 문제가 아닙니다. 성별 위계(gender hierarchy)라는 개념, 즉 사회에서 성별에 따라 권력이 다르게 배분되는 구조가 우리가 '로맨틱하다'고 느끼는 기준 자체를 만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신데렐라 코드가 작동하는 방식

제가 시크릿가든을 처음 봤을 때는 몰랐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이 드라마의 구조는 굉장히 영리하게 짜여 있었습니다. 남녀 주인공의 몸이 뒤바뀌는 설정, 재벌 남자가 가난한 여자의 삶을 직접 겪는 장치. 이게 단순한 코미디 코드가 아니라, 그런 기적 같은 장치 없이는 드라마에서조차 신데렐라 로맨스가 불가능한 시대가 됐다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신데렐라 판타지(Cinderella fantasy)란 낮은 계층의 여성이 높은 계층의 남성과의 사랑을 통해 신분이 상승하는 서사 공식을 말합니다. 이 공식이 반복적으로 통하는 이유는, 시청자들이 계급 간 권력 차이에서 오는 긴장감을 에로틱한 설렘으로 전환해서 읽어내도록 문화적으로 훈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실제로 드라마에서 재벌 남성 캐릭터들이 보이는 오만함이나 폭언이 비판받지 않고 오히려 매력적으로 소비되는 건, 그 힘의 격차 자체를 설렘으로 받아들이는 로맨틱 코드가 이미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드라마들을 보면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게 바로 이 지점이었습니다. 가난한 주인공은 항상 착하고 성실하고, 부유한 주인공은 돈은 많지만 외롭고 차갑다는 패턴이 너무 뻔하게 반복됐거든요.

재벌 남성 캐릭터에 삐뚤어질 이유를 만들어주는 방식도 일관됩니다. 충격적인 사고 후 폐소공포증이 생겨서, 혹은 과거의 상처 때문에 차가운 사람이 됐다는 식의 설정들 말입니다. 드라마가 재벌에게 그토록 관대한 이유를 만들어주는 방식은, 현실에서도 권력자의 행동에 면죄부를 주는 방식과 묘하게 닮아 있습니다.

한국 드라마 속 재벌 캐릭터가 반복적으로 활용하는 공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재벌 남성은 오만하지만 그 이면에 순수함이 있다
  • 가난한 여성은 착하고 당찬 성격으로 재벌 남성을 변화시킨다
  • 재벌 남성의 무례함에는 반드시 '상처의 이유'가 뒷받침된다
  • 진짜 재벌을 위협하는 가짜 재벌이 악역으로 등장해 갈등을 형성한다

 

 

 

미화 논란과 지금 우리가 볼 드라마

제 경험상 이 부분이 가장 불편하게 다가왔습니다. 눈물의 여왕을 보면서 특히 그랬는데, 창업주 홍만대 회장의 비자금 9000억 원이 드라마 후반부에 경영권 분쟁의 핵심 변수로 등장하는데도 그게 전혀 문제로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회사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한 직원들의 이야기가 미담처럼 그려졌습니다.

이건 단순히 드라마 하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재벌 미화(chaebol glorification)란, 재벌 가문의 세습과 권력 집중을 정당화하거나 감동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시청자가 비판적 시각을 갖지 못하도록 만드는 서사 방식을 말합니다. 한국의 재벌(chaebol)은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도 등재된 단어로, 특정 가족이 경영권을 세습하며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한국 고유의 기업 구조를 의미합니다.

드라마가 이런 구조를 어떻게 재현하느냐는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한국방송통신위원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TV 시청 시간은 여전히 하루 2~3시간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드라마가 대중의 인식 형성에 미치는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출처: 방송통신위원회).

또한 문화체육관광부의 조사에서도 K드라마는 한국의 대표 문화 콘텐츠로서 해외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이는 재벌 서사가 국내외 시청자의 한국 사회 인식에도 영향을 준다는 의미입니다(출처: 문화체육관광부).

이노베이션 없이 반복되는 신데렐라 코드는 이제 예전만큼 설레지 않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시크릿가든을 보며 그 설렘에 충분히 빠졌지만, 같은 구조의 드라마가 10년 넘게 반복되는 걸 보니 이제는 그 뻔함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설렘 뒤에 어떤 전제들이 숨어 있는지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재벌 로맨스 드라마를 볼 때 한 번쯤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내가 설레는 게 진짜 두 사람의 감정 때문인지, 아니면 계급 격차에서 오는 권력의 긴장감에 반응하는 건지를요. 그 질문 자체가 드라마를 훨씬 더 풍부하게 읽는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참고: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05302
https://v.daum.net/v/JYZfFwiT8R?f=p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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