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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글로리, 미스터 션샤인을 쓴 김은숙 작가는 어떻게 대사를 쓸까

by moneybrick 2026. 4. 28.

드라마 대사 하나가 유행어가 되고, 장면 하나가 밈으로 번지는 작가가 있습니다. 김은숙 작가 이야기입니다.

저는 미스터 션샤인, 태양의 후예, 도깨비, 더 글로리까지 쭉 보면서 처음에는 배우들 연기 덕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배우 입에서 나오는 대사 자체가 이미 무기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대사 철학: 감정을 전달하는 무기로서의 대사

드라마 대사를 단순한 정보 전달 수단이 아니라 감정의 무기로 쓴다는 표현, 김은숙 작가의 작업 방식을 보면 이게 그냥 수사가 아닙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잘생겼어요?" 같은 대사가 오글거린다는 지적을 받을 때 작가 본인은 "저는 그렇게 남자 꼬셨는데"라고 답했다는 게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이 꽤 인상 깊었습니다. 픽션이 아니라 자기 삶에서 끌어올린 문장이라는 뜻이니까요.

 

시나리오 작법(screenplay writing)에서는 대사의 기능을 크게 두 가지로 봅니다. 여기서 시나리오 작법이란 극본을 쓰는 기술 전반을 가리키는 말로, 단순히 말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의 욕망과 갈등을 언어로 압축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플롯을 진행시키는 기능적 대사, 다른 하나는 캐릭터의 내면을 드러내는 감성적 대사입니다. 김은숙 작가의 대사가 유독 기억에 남는 이유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잡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더 글로리를 보면서 이 지점이 가장 또렷하게 느껴졌습니다. "모든 날이 흉흉할 거야" 같은 문장은 정보도 없고 플롯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한 줄이 극 전체의 정서를 압축합니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다고 저런 문장이 나올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작가 스스로도 타고난 감각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감각이 어린 시절 읽었던 문학 작품들, 특히 오정희·신경숙 작가의 글과 시집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좋은 문장을 읽고 거기서 홀리는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대사를 쓸 때도 그 감각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김은숙 작가가 후배 작가들에게 전하는 조언도 이 지점과 맞닿아 있습니다.

  • "끔찍한 신일수록 깜찍하게 써라"
  • "한 보 말고 반 보만 신선하게 써라"
  • "일단 사람을 홀려놓고, 나중에 돌이켜보면 어떤 이야기였는지 알아차릴 수 있게끔 써라"

이 세 가지는 결국 독자와 시청자를 먼저 끌어들이고, 메시지는 그 이후에 스며들게 한다는 전략입니다. 교훈을 먼저 들이밀면 사람은 도망가니까요.

 

 

 

필력비결: 타고난 재능인가, 쌓인 경험인가

글쓰기 실력을 논할 때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 서사 역량(narrative competency)입니다. 여기서 서사 역량이란 경험이나 정보를 단순히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도록 이야기로 엮어내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 역량이 순수하게 타고나는 것인지, 훈련으로 키워지는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창작 교육 분야에서도 오래된 주제입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방송 작가 실태 조사에 따르면, 국내 드라마 작가 중 정규 창작 교육 과정을 이수한 비율은 절반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즉 학습보다 현장 경험과 독서, 그리고 개인적 감수성이 작가의 필력을 결정하는 데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김은숙 작가 본인은 강릉의 가구 공장에서 7년간 경리로 일하며 모은 돈으로 스물일곱 살에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에 진학했습니다. 그 시절 혼자 지방에 남아 토지, 아리랑, 태백산맥 같은 대하소설을 읽고 시집에 빠져 지냈던 경험이 지금의 문장력으로 이어졌다고 직접 밝힌 바 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드라마 작가를 시작하고 나면 책 읽을 시간이 없으니 그 전에 최대한 읽어둬야 한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비로소 이해됐습니다.

글쓰기에서 내러티브 텐션(narrative tension), 즉 이야기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기술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내러티브 텐션이란 독자나 시청자가 다음 장면을 궁금해하게 만드는 서사적 긴장 구조를 가리킵니다.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를 보면 이 긴장감이 대사 단위에서도 작동합니다. 한 문장이 끝나면 다음 문장이 궁금해지는 구조, 이게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건 직접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압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유치하거나 오글거린다는 비판을 받는 대사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은숙 작가의 문장이 계속해서 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필력이란 문장 기술만이 아니라 사람 마음을 꿰뚫는 감각이기 때문입니다.

 

 

캐릭터서사: 신데렐라가 아닌 쌍방 구원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를 두고 오랫동안 따라붙는 비판이 있습니다. 권력을 가진 남성이 여성을 구원하는 서사, 즉 일종의 신데렐라 서사라는 지적입니다. 저도 파리의 연인이나 시크릿 가든을 다시 떠올려보면 그 비판이 전혀 근거 없지는 않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작가 본인은 이 구도를 쌍방 구원 서사로 정의합니다. 쌍방 구원 서사란 한쪽이 일방적으로 다른 한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두 인물이 서로를 통해 각자의 결핍을 채우고 변화하는 이야기 구조를 말합니다.

이 틀은 더 글로리에서 한층 선명해집니다. 문동은은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 주여정과 연대하지만, 그 관계는 일방적 의존이 아닙니다. 동은과 현남의 관계, 동은과 경란의 연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피해자들이 남성의 개입 없이 서로를 지탱하는 구조, 이게 김은숙 작가 본인이 "여자 김은숙과 성공한 작가 김은숙이 만난 결과물"이라고 표현한 부분입니다.

캐릭터 빌딩(character building), 즉 인물을 구축하는 방식에서도 변화가 보입니다. 캐릭터 빌딩이란 극 중 인물의 배경, 욕망, 결핍, 모순을 설계해 입체적인 존재로 만드는 작업을 뜻합니다. 예전 작품에서 여성 캐릭터는 착하고 순결하면서도 돋보여야 한다는 제약이 있었다면, 이제는 젊은 작가들과 회의를 거치며 그 기준을 계속 점검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고 합니다. 남자가 먼저 키스하는 장면이 폭력으로 읽힐 수 있다는 지적을 회의 중에 받고 고민한다는 이야기는 저한테 솔직하고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한국드라마학회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 드라마에서 여성 주인공 캐릭터의 자기 결정권 표현 빈도는 2010년대 중반 이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출처: 한국드라마학회). 이러한 흐름 속에서 더 글로리가 젊은 시청자층에게도 뜨겁게 반응을 얻은 것은, 장르가 바뀌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결국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가 계속 통하는 이유는 대사 기술 하나가 아닙니다. 자기 삶에서 길어올린 감각, 수십 년에 걸쳐 쌓인 독서와 경험, 그리고 시대와 함께 흔들리면서도 놓지 않으려는 이야기의 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으로 나올 신작에서 그 균형이 어떤 방식으로 표현될지가 솔직히 기대됩니다. 작가가 준비 중이라고 밝힌 현대극, 이미 시작 전부터 궁금해지는 건 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참고: https://www.yna.co.kr/view/AKR20160407147700033
https://cine21.com/news/view/?mag_id=104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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